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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으로서의 슬픔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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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베이유는 우리 시대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웃을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웃고 싶다. 우리의 상가도 웃음의 도가니였다. 그것은 웃음으로 슬픔을 이기려는 지혜가 아니었을까? 따라서 슬픔은 무시하거나 거부하거나 버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그것은 빛나는 기쁨과 같은 정도로 강력한 삶의 일부이다. 슬픔이 없고 기쁨만 있다면 인간은 더욱 교만하게 될 지도 모른다. 외로워 사랑하듯이 슬퍼야 기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슬픔과 기쁨은 구별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둘을 포함한 감정은 단순히 개인의 내면이나 주관이나 심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나아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 즉 시대의 문제라는 점도 상식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슬픔도 사실은 사회적인 것일 수 있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이상 어쩌면 순수하게 개인적인 슬픔은 아예 있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자살은 물론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한국인의 자살도 단순히 개인적인 특유 심리 탓만은 아닐 것이다. 지브란의 슬픔은 오스카 와일드의 슬픔에 오면 더욱 높아져 인간을 다시 신에게 귀의시키는 것이 된다. 바로 종교다. 종교religion란 인간과 신을 다시re 연결한다ligion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테도 <<신곡>>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 데 그 문맥은 반드시 일반인의 종교적 태도와 같지 않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단테가 달리 말했다고 해도 슬픔 때문에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뒤에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단테와 달리 와일드는 종교를 부정한다. 그에게 종교란 예술이다. 그런 예술에 이르는 최고의 감정이 슬픔이다. 여기서 슬픔은 예술 창조의 최고 근원이 된다. 나는 슬픔이야말로 인간이 감득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서이며, 그것이 모든 위대한 예술의 전형이고, 동시에 시금석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 인생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그 궁극의 전형이 되는 것은 슬픔이다. 기쁨과 웃음의 배후에는 조잡하고 냉담한, 게다가 무신경한 기질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의 배후에는 늘 슬픔만이 있다. 고통은 쾌락과 달라 가면을 쓰는 일이 없다.… 나는 슬픔이 유일한 진리로 보일 때가 있다. 다른 것은 눈 혹은 기호의 환상이며, 그것은 눈을 현란시키고, 기호를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으로부터는 여러 가지 세계가 만들어졌다. 아이가 태어나려고 할 때도, 별이 탄생하는 데도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그뿐 아니라 슬픔에는 어떤 강렬하고도 이상한 현실성이 감돌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 배주란 옮김, <<옥중기>>) 정치‧경제‧사회의 차원을 예술의 차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슬픔을 새로운 창조를 위한 밑거름으로 긍정하는 태도는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그것은 슬픔을 무조건 잊는 것이 아니라 슬픔 속에서도 곧추 서서 현실과 대결하여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박홍규, <슬픔의 공동체>,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20-222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20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