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DB에서 검색하고자 하는 내용을 입력하고 를 클릭하십시요.


   자살 공화국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내용보기

어느 대통령의 자살을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는 한국적 현상이라고 볼 필요야 없겠지만 그런 자살의 성행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슬픔인지도 모른다. 자살의 이유 중에는 분노나 고통, 가난과 우울증, 명예 손상 등이 있지만 슬픔이 그 하나로 나타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물론 너무 슬퍼서 죽고 싶다고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 좋은 보기인 베르테르의 자살은 그 소설의 제목처럼 슬픔으로 인한 자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그 제목의 번역이 <<젊은 베르터의 고뇌>>로 바뀐 것처럼 슬픔이라기보다는 좌절이나 인내심의 결여나 성급함으로 인한 포기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 타당할지 모른다. 에밀 뒤르켐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때에는 자신의 모든 욕구와 변화에 대한 갈망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키고 난 후에도, 정복할 수 없는 장애를 향하여 돌진하다가 그 때문에 지나치게 제약적이 된 삶을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베르테르의 경우가 그러하다. 베르테르는 자신을 질풍노도의 마음이라 부르고 무한에 심취했으며 사랑의 실패 때문에 자살했다. 성공에 심취했던 예술가들이 한 순간의 야유나 심한 비평 또는 인기가 하락하면서 자살하는 경우도 같은 것이다.(에밀 뒤르켐, 황보종우 옮김, <<자살론>>) 뒤르켐이 말하는 예술가의 자살이 모든 예술가의 자살을 설명하는 것일 수는 없다. 또한 성공에 심취했다가 인기가 떨어지면서 자살하는 경우가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수도 없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가나 사업가 등의 경우에도 있을 수 있다. 뒤르켐은 자살의 이유로 슬픔(물론 다른 이유로 인한 슬픔은 있을 수 있다)을 들지는 않았으며, <<자살론>>에서는 다음 문장을 제외하고는 슬픔에 대한 언급을 거의 보기 어렵다. 슬픔은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은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세계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슬픔은 우리 자신의 산물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슬픔을 만들어내는 것은 비정상적인 사고이다.(같은 책) 위 문장의 전후 문맥에는 슬픔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슬픔과 자실의 관계에 대한 뒤르켐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여하튼 뒤르켐이 자살은 물론 슬픔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주관적이고 충동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감정을 최초로 사고한 플라톤 이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데카르트나 그의 제자인 말브랑슈가 관념을 빛으로, 감정을 어둠으로 대비시킨 서양적 사고의 전통에 입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말브랑슈는 슬픔을 비롯한 감정이 우리를 감동시킬 수는 있어도 밝혀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는 주체와 개인의 개념에서 감정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 점에서는 크게 기여했으나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주장한 점에서는 여전히 플라톤의 후예였다. 그런 전통을 갖지 못하는 비서양 사회에 사는 우리도 인간의 마음을 이성과 감정으로 나누고 이성으로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플라톤의 후예들이다.  
 
박홍규, <슬픔의 공동체>,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12-214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12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