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DB에서 검색하고자 하는 내용을 입력하고 를 클릭하십시요.


   가난, 전쟁, 독재의 슬픔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내용보기

내 부모의 어린 시절은 거의 굶고 살았던 탓에 가난의 슬픔으로 가득 찼다. 아니 그 가난은 슬픔이 아니라 고통이다. 나 자신 그 가난을 기억한다. 전쟁 통에 태어난 우리 세대는 가난이 무엇인지 안다. 물론 부모 세대 정도는 아니다. 부모 세대에게 가난 다음으로 불행하고 끔찍한 슬픔은 전쟁이었다. 나는 전쟁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을 모르지만 그 비참함은 충분히 안다. 그리고 독재의 슬픔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슬픔도. 약 30년 전 군대에 있을 때나 외국에서 공부할 때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전라도 친구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지금까지 강연 같은 것을 지극히 하기 싫어하면서도 전라도에서 부르면 꼭 다녀왔다.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의 슬픔을 나는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전라도 사람들이 갖는 슬픔에 동조하고자 노력했다. 광주 이전에 내가 그런 심정을 가졌던 대상은 베트남이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내 주변에도 많아 자주 그 잔인한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처음부터 무용담이 아니었다. 지금 베트남에서 김우중을 비롯한 한국 자본가들의 침략 경영이 세계 경영 운운하며 찬양되고 있는 것도 나에게는 무의미하다. 아니 베트남전 참전보다도 더 혐오스럽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의 한 장면 나에게 베트남은 나와 동갑인 바오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 나오는 그 베트남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7세에 군에 가서 8년간 전쟁을 치렀다. 흔히 영웅주의의 나라라고 하는 베트남의 가장 치열한 전쟁에 대한 이 소설에 영웅은 없다. 전쟁의 슬픔에 젖은 사람들뿐이다. 그 주인공 끼엔의 슬픔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보다 더 슬프다. 그 소설은 전쟁 중 나폴레옹이 즐겨 읽었다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나폴레옹이 괴테를 만났을 때 오로지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 명예 손상도 또 다른 이유라는 점에 대해 지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독일을 침략하여 젊은이들을 무참하게 죽게 한 적장 나폴레옹과 독일 문인 사이의 이야기치고는 참으로 기묘하다. 당시 독일이든 프랑스든 모든 젊은이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큰 슬픔은 전쟁이 아니었는가?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제는 세계문학전집에 괴테가 아니라 바오닌이 자리 잡아야 한다.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18세기 독일 귀족사회의 연애소설을 우리가 왜 읽어야 하는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론 그 소설에서 말하는 세대적 갈등에서 오는 슬픔이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동감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바오닌은 우리도 참전한 전쟁의 허무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한국 작가들도 베트남전쟁에 대해 쓴 바가 있지만 바오닌의 소설과는 달랐다. 심지어 6‧25에 대한 소설도 바오닌 소설처럼 쓰여지지는 못했다. 베트남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약소국에 대한 침략전쟁의 진실을 알리는 소설이나 기록 등도 매우 중요하다. 약 20년 전 전쟁기념관을 만든다고 할 때 전쟁을 왜 기념하느냐는 취지의 글을 썼다가 나이 70이 넘은 상이군경들에게 며칠 동안 집과 직장에서 고통을 당한 적이 있다. 아니 고통이라기보다도 슬픔이었다. 그 당시는 물론 지금도 반전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이 다시 터져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전쟁을 부추기는 어떤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아직도 한반도에서는 절대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약속조차 못하고 이산가족 천 만 명이 저렇게 한이 맺힌 채 세상과 이별하기까지 방치하는 것이 세계 경제 10위권 운운하는 나라의 수준인 것인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조차 못하게 하면서 경제발전 운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나는 이런 현실이 너무 슬프다. 베트남전에서 한국인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일본인 언론인들의 잘못된 보도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바오닌을 비롯한 많은 베트남인들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특히 선틴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그 학살 자체는 물론 비참하다. 그러나 그런 학살이 생기는 또 다른 이유가 그 피학살자들을 인간이 아니라 노예나 동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더 슬프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이나 월맹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빨갱이는 인간이 아니다. 나쁜 빨간 사상에 물든 괴물이다. 그들은 당연히 죽어야 한다. 죽이는 것이 옳다. 모두 죽여야 한다. 집도 절도 들도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 모두 파괴해야 한다. 이 절멸의 사상, 파멸의 이념, 파괴의 철학이 학살의 요인이고 전쟁의 본질이다. 군사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강력한 민족이나 국가가 그보다 약한 자들을 침략하고 지배하며 착취할 때 그 대상은 그 지배자와 동등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반항하면 죽이는 것이 사상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허용되었다. 그것이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제국주의의 적은 군인이 아니다. 제국주의 전쟁은 서양인끼리의 전쟁에 불과하다. 따라서 민간인 보호라는 최소한의 전쟁 윤리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 결과 여자도 노인도 아이도 무참하게 학살된다. 우리는 미군이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에 분노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잘 모른다. 1969년 쾅가이 성 선틴 현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군 청룡사단은 월맹군 공격에 대한 분풀이로 전투 구역 내의 두 개 마을 주민을 모두 학살했다. 내가 찾은 절 옆에 있는 500제곱미터 정도의 공터에는 무려 1,000여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남자라고는 모두 늙은 승려뿐이었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노근리뿐만이 아니듯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도 선팀에 그치지 않는다. 베트남만이 아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전쟁, 학살, 극빈의 현장이 있다. 그것을 빼고 어떻게 우리 시대의 슬픔을 말하랴.  
 
박홍규, <슬픔의 공동체>,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08-212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0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