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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구경꾼들이 조우한 죽음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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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구경꾼들>>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죽음과 마주치게 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보았던 것처럼 화자인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나’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이다. 외할머니가 양잿물을 마시려했을 때 어머니는 뱃속에서 외할머니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이렇게 이들은 삶 이전에 죽음이라는 사태와 먼저 마주친다. 이들의 생사는 다른 이의 결심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뱃속의 아이들에게 삶과 죽음은 자기 마음대로 조종 가능한 것이 아니다. 윤성희 소설에 나타난 낙태에 대한 어머니들의 고민과 아이의 출산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삶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계획하고 설계하도록 요구하는 현대사회의 삶의 양태는 죽음을 배제한다. 과연 죽음은 계획 가능한 것일까? 근대 이전의 죽음은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사 하였으며 가족들은 애도를 위한 시간을 예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현저하게 발전한 현대사회에서는 죽음을 예상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 사람들로 하여금 치열하게 자기 삶을 계획하도록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사건이나 사고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구경꾼들>>에서 큰삼촌의 죽음이 그러하며 할아버지와 ‘나’의 부모가 맞은 죽음 또한 우발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큰삼촌은 옥상에서 뛰어내린 여자의 몸에 깔려죽었고, 할아버지는 성추행을 당하는 아이를 구하다가 범인이 휘두른 흉기에 맞아죽는다. 부모님은 돌집을 짓고 사는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집이 무너져 죽는다. 이렇게 <<구경꾼들>>에서 죽음은 갑작스럽다. 이별을 예상할 수 없었기에 남은 사람들은 더욱 고통스럽다. 큰삼촌의 죽음 후 ‘나’의 부모님은 오래도록 멀고 먼 여행을 떠난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세계 각지로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쓰던 물건들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한편 남겨진 ‘나’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검수하는 빵을 사먹으며 오년 동안 팔백 개가 넘는 빵 봉지를 모은다. ‘나’의 부모님은 여행을 통해 그리고 ‘나’는 자아 정립적 수집행위를 통해 삼촌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빈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애도행위 후 이들의 삶은 더 이상 진공포장 된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죽음은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끼어들면서 때때로 살아남은 자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① 그날, 작은삼촌은 혼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탁자에는 잔을 두 개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작은형이라면 뭐라고 말해주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② 나는 큰삼촌의 모자를 쓰고 가출했다. 모자는 여전히 컸다. 나는 삼촌의 모자가 내 머리에 맞는 날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다. ③ 새벽이슬이 내려앉은 마당을 맨발로 걸으면서 아버지는 큰삼촌을 떠올렸다. 에이, 형 왜 그래. 큰삼촌이 권투를 하듯 주먹으로 어깨를 툭, 툭, 쳐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큰삼촌이 죽은 후 가족들은 모두 힘들거나 외로울 때 그를 떠올린다. ①에서는 작은삼촌이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실연의 아픔을 느끼며 작은형, 즉 화자의 큰삼촌이라면 어떤 충고를 해주었을지 떠올려보는 장면이다. ②에서는 큰삼촌의 죽음 후 물려받은 모자를 늘 쓰고 다니며 큰삼촌을 항상 기억하려는 ‘나’의 바람이 확인된다. ③은 ‘나’의 아버지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울증을 앓을 때 동생인 화자의 큰삼촌을 떠올리는 모습이다. 이처럼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은 산자의 삶 속에 끊임없이 끼어들면서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듬직함으로 남은 이들의 삶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들 가족에 그치지 않는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신기하게 삶을 선물 받은 이들의 이야기는 ‘나’의 부모님이 세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부모님이 직접 찍은 사진의 뒷면에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낸 엽서들로 ‘나’와 아버지, 어머니는 여행기를 출판한다. 앨범 세 권 분량의 엽서를 세 사람이 각자 뽑아 배열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이 여행기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 엽서들이 수많은 별”이 되어 “그 별들을 보는 사람들이 각자 별자리를 만들 거”라는 아버지의 예상이 적중했다. 이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상실과 아픔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으로 별자리를 만들어 나침반처럼 삶의 방향을 인도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죽은 자의 자리를 남겨두고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겐 이젠 삼촌이 한 명밖에 남지 않았고 고모에게도 오빠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삼촌, 오빠, 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라는 ‘나’의 의문은 할머니의 부탁으로 땅에 묻었던 김장독을 파내며 풀린다. “우리들은 아주 오랫동안 땅을 팠다. 작은삼촌은 어렴풋하게나마 할머니가 왜 항아리를 꺼내려는지 알 것도 같았다.” 깨달음처럼 나타나는 이러한 서술은 다음과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구경꾼들>>은 땅에 파묻혀있던, 현대사회에서 외면했던 죽음을 우리 곁으로 파내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빈자리, 즉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구경꾼들>>은 ‘나’가 기브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갈비뼈가 부러져 기브스를 한 것인데, 어처구니없게도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다 발생한 사고였다. ‘나’가 기침감기에 걸린 것은 고모 때문이다. 고모의 기침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고모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옮겨온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민감하고 죽음 또한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공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죽음은 죽은 자와 가까웠던 이들에게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심적 고통을 준다. 우리는 상실 앞에서 냉정을 유지하도록 기대 받지만 심리적 고통 또한 뼈가 부러진 것과 같은 물리적 고통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뼈가 붙길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슬픔 또한 애도기간을 거쳐야한다. 그리고 치유의 시간이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 녹아 죽음과 삶이 화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류도향, 강애경, 정유미, <죽음의 세 가지 풍경>,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96-199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9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