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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이 분리된 사회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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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벽시계를 바라본다. 초침이 없는 시계는 멈춘 것처럼 보인다. 마음속으로 60을 세고 분침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분침은 “마치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년은 증조할머니부터 소년 자신까지 4대에 걸친 가족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삶이란 곧 죽음과 화해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시간이 지나가는 방법을 눈여겨본 소년은 바로 윤성희 장편소설 <<구경꾼들>>의 주인공이다. 이야기의 화자인 소년, 즉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혼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주머니에 지우개를 넣고 다니며 아이를 지워야 할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결심한 부모님 덕분에 태어날 수 있었던 ‘나’는 조부모님과 삼촌 둘, 고모라는 울타리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외할머니까지 9명, 대가족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먼저 큰삼촌이, 몇 년이 흘러 할아버지가, 또다시 몇 년이 흘러 ‘나’의 부모님이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으로써 이 빠진 울타리처럼 빈자리가 생긴다. 남은 가족들은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처럼 <<구경꾼들>>은 9명 가족의 출생과 삶, 죽음 그리고 애도의 과정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구경꾼들>>을 통해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또 하나의 풍경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곁을 떠나버린, 사랑했던 사람들에 관한 추억과 그들이 남긴 기억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또 다시 그 위에 자신의 색깔을 덧칠한다.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상실을 치유하며, 삶 가운데 죽음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서 여러 빛깔로 이루어진 자신의 운명과 화해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화해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도처에 만연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삶 속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러한 관행은 마치 죽음을 특정한 장소에서만 마주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삶이란 죽음이 끼어들지 않는 진공포장 같은 보호 속에서 영위되는 것이라는 생각의 일반화는 죽음의 담론화를 금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죽음이라는 상실의 슬픔은 애도라는 정당한 절차 속에서 자연스럽게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애도를 위해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무능자로 취급받는다. 결국 슬픔을 느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임신이 곧 출산으로 이어졌다. 임종은 집 안에서 이루어졌고 장례식은 병풍 뒤에 관을 모셔두고 가족과 지인들의 통곡 속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낙태는 선택이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멸균된 병원의 침대에서, 또는 우발적 사고로 객지에서 맞이하는 것이 되었으며 장례식은 장례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식장에서 거행된다.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 있지 않다. 근대의 시작을 분기점으로 하여 죽음은 그 성격이 급격히 달라졌다. 보드리야르는 <<섹스의 황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음은 계약 만기일이 아니고 그것 역시 삶의 뉘앙스를 지니며, 또한 삶도 죽음의 뉘앙스를 가진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우리의 근대적 개념은, 아주 다른 묘사들의 체계, 즉 기계와 기능의 체계에 의해 지배된다. 기계는 작동하거나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물학적 기계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삶은 시작될 때부터 죽음 속에 빠져 있고, 살아있을 때도 애도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죽음에 불가역적인 성격이 부여되면서 삶의 도처에 존재하는 죽음이 삭제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삶 가운데 죽음이 있으며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삶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죽음과 화해하고 삶과 죽음의 새로운 관계설정 속에서 다시 삶을 품어 안는 과정은 매우 지난하며 고되다. <<구경꾼들>>의 주인공들은 깨달음의 여정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우발적인 죽음을 경험해야했고, 무척이나 먼 여행을 해야만 했으며,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죽음이 곧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윤성희의 작품에서는 후회와 죄책감을 감내하고 망각이 아닌 기억하기로 죽은 자들을 삶 가운데 끌어안음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고 보고 있다. 이는 곧 현대사회의 균질화 된 삶, 계획 가능한 삶이라는 허상을 깨는 불가해한 죽음에의 상기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관계설정을 사회에서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재설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의 구경꾼들이던 이들이 사랑하던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며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구경꾼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류도향, 강애경, 정유미, <죽음의 세 가지 풍경>,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93-196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93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