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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새의 죽음을 경유하는 여정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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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소설집 <<가나>>에는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유지하는 대신 죽음을 택하거나, 혹은 죽음 앞으로 내몰리는 인물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작품 속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을 맞이하거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인물들의 갈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보는 쾌감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죽음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후의’ 방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죽은 자가 화자로 설정된 독특한 서술법이 구사된 「가나」에서 죽음 이후의 풍경들은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슬프다. 화자인 ‘나’는 죽고 난 후에야 더없는 자유와 가벼움을 누리며 가족에게 다가가는데, 사실 이러한 설정은 죽음 이외의 다른 방편으로는 가족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그의 처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소 비극적이다. 「벽」에서 일꾼9는 여타의 인물들이 그러했듯, 죽음 앞에서 역시나 가족들을 떠올린다. 염전에서의 생존을 버리고 인간다운 죽음을 택했던 그의 모습이 독자들에게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살아서는 결코 가족들과 조우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려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굿나잇, 오블로」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가족 전체가 함께 죽음을 택하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인물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장면은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위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처참한 삶의 모습, 즉 관계의 상실과 단절의 문제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온전하게 극복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작품들 속에서 죽음은 생존뿐인 삶의 비극성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되는 한편, 비극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장치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시선이 복잡하게 교차되는 작품들 속에서, 「떠떠떠, 떠」는 조금 다른 유형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도와줄 수도 없는 저 먼 세계에서 그녀는 홀로 싸우고 있다. 나는 그녀의 벗은 몸을 내 옷으로 덮어주고 처음으로 그녀에게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많은 말을 할 수도 없고 단 한 마디도 정확히 발음되지 않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말한다. 그녀는 듣는다. …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 사, 사아, 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아, 아아앙, 해. 인용문은 작품 속에서 언어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한 여자를 보며, 불완전한 언어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녀가 겪고 있는 죽음과도 같은 발작은 타인이 볼 수도 만질 수도 도와줄 수도 없는,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그러하듯 말이다. 앞서 다루었던 세 작품의 경우, 인물들의 삶이 소멸되는 지점에서 죽음이 ‘직접적’인 사건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떠떠떠, 떠>>의 경우에는 삶이 존속되는 가운데 죽음과 ‘유사한’ 경험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한 여자와, 언어 장애로 사람들의 모멸스러운 시선을 견뎌야만 하는 ‘나’는 삶 속에서 이미 짧은 죽음의 순간들을 수없이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이다.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인물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공감과 연대로 이루어진 작은 길을 내면서부터 죽음의 순간들을 함께 견뎌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반복되는 소설집 <<가나>>의 인물들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삶을 희구하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바라는’ 삶과 그들이 ‘처해있는’ 삶의 벌어진 틈새가 죽음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기에 삶이 아닌 죽음을 희구하는 자들처럼 보일 뿐이다. 인물들은 그 틈새를 경유하지 않으면—다시 말해 죽음을 경유하지 않으면—자신들이 바라는 인간다운 삶을 향해 건너갈 수가 없다. 그들이 길을 건너는 방식은 다양하다. 혼자서 혹은 누군가와 함께 죽음을 택하기도 하고, 짧은 죽음의 순간들을 수없이 견뎌내며 살아가기도 한다. <<가나>>는, 인물들이 그렇게 틈새의 죽음을 경유하여 그들이 희구하는 삶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기나긴 여정이다. 고단한 그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수많은 시선과 풍경들을 마주하며 자주 멈춰 서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ㅍㅍ 
 
류도향, 강애경, 정유미, <죽음의 세 가지 풍경>,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91-193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9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