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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과 타살의 경계가 모호한 죽음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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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는 관객으로 하여금 경선의 살인과 거짓된 삶을 세 가지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첫째는 경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은 약혼자 문호의 대사에서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근데…, 그게 전부 다른 사람 얘기잖아. 도대체 내가 알던 강선영은 누구야? 나 그 여자 꼭 만나야 돼.” 문호는 선영의 이름이 가짜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녀의 행방을 찾아다니며 알게 된 선영의 진짜 이름, 경선은 자신이 사랑한 선영과는 완전히 딴판의 사람이었다. 한 줄기 빛도 스며들지 않는 폐쇄된 자기연민의 공간에서 경선은 사람까지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위선자로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호는 선영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과 신상이 모두 가짜였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했던 마음만큼은 진실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호는 자신이 사랑한 약혼녀 선영과 그녀의 실체로 밝혀진 살인자 경선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선영에 대한 사랑과 경선에 대한 증오 사이에서 문호는 가짜 선영의 마음속에 있었을 일말의 감정적 진실을 붙잡고 싶어 한다. 선영이 누구이고, 경선은 누구인지, 또 경선의 마음에서 가짜는 무엇이고 진짜는 무엇이었는지, 문호는 그 경계를 가르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경선은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분열 상태에 빠져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선을 처벌과 응징이 필요한 악인으로 규정하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은 문호의 부탁으로 경선의 행방을 추적하는 사촌형 종근의 대사에서 나타난다. “사람 죽이는 인간들을 네가 몰라서 그래.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종자들이야. 애초에 우리하고는 인간 종류가 다르다고.” 전직 형사였던 종근은 영화 초반부터 경선의 수상한 행적만으로 그녀가 살인자라는 확신을 갖는다. 종근은 사람을 죽인 경선이 우리와는 종류가 다른 존재라고 말하며 문호에게 그녀를 그만 잊으라고 종용한다. 셋째는 경선이 벗어날 수 없는 외부적 힘을 응시하는 시선이다. 이 시선은 살인자 경선을 돈이라는 잔혹한 거미줄에 걸려든 힘없는 나비 같은 존재로 바라본다. 선영으로 살아가는 동안 경선이 문호에게 한 대사에서 이런 시선이 암시된다. “공작나비 날개에는 눈알 같은 무늬가 있는데, 위험이 닥치면 날개를 쫙 펴서 그 무늬를 훨씬 크게 보이려고 한대. 그 모습을 더 공포스럽게 보여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공작나비의 공포스러운 몸짓이 외부에서 닥쳐온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자동반응인 것처럼, 경선의 살인과 위선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강압적 힘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화차>는 우리 시대의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한을 여린 체구를 가진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이토록 여리고 사랑스런 여인의 실체가 살인자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영화의 수수께끼가 풀려가는 내내 우리에게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 공포감은 경선이 결코 보통의 인간과 태생이 다른 악마적 본성을 가진 이가 아니라,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평범한 욕망을 가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화차(火車)는 지옥으로 가는 불수레를 의미한다.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달리는 화차에 한번 올라탄 사람은 다시는 하차할 수가 없다. 우리는 화차에 올라탄 경선을 보면서 문호처럼 누구를 진심으로 믿고 살아야 할지 모를 깊은 혼란에 빠질 수 있고, 종근처럼 그녀를 우리와 다른 악인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살인행위가 사람보다 돈이 우위에 선 사회에서 강요된 자기포기의 결과임을 이해할 때, 그녀의 범죄는 단지 그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확장된다. 그녀는 경선도, 선영도 아닌 제3의 이름을 찾아 또 다시 범행 대상을 물색한다. 경선은 치밀하게 살인 계획을 세우고, 차분히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은 새로 찾은 제3의 이름마저 돈 때문에 자기를 포기한 또 한명의 경선과 선영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경선과 선영이 사채의 덫에 걸려든 순간 더 이상 자기 삶을 자기 힘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파산으로 내몰린 것처럼, 그 누구도 돈의 절대적 위력에 저항할 수 없는 시대다. 내가 아닌 삶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선의 살인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화차>의 살인이 잔인한 이유다. 문호는 드디어 제3의 여자를 살해하기 위해 기차역에 나타난 경선을 붙잡는다. 경선은 ‘너는 누구냐’고 묻는 문호의 절규에 자신을 사람이 아닌 쓰레기라고 칭한다. 커다란 배신감과 절망감에 빠진 문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자신을 사랑했었냐고 묻는다. 경선은 고개를 저으며 문호에 대한 사랑까지 부정한다. 문호는 경선을 놓아주며 소리친다. “가! 더 이상 찾지 않을 테니까 가! 근데… 그냥 너로 살아!” 너로 살라는 문호의 절규는 선영이 껍데기뿐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극한 분노이면서, 동시에 경선이 이제라도 사람답게 살기 바라는 마지막 선의의 충고일 것이다. 문호가 놓아준 경선은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면서 기차역 건물 옥상까지 쫓기게 된다. 경선을 쫓아가는 종근도 문호와 같은 말을 소리친다. “차경선씨! 더 가면 안돼요. 더 갈 데가 없어. 이제 다 끝났어. 자수해요. 이제 당신으로 살아!”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로부터 도망쳤던 경선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이름을 부정할 수 없는 곳에 이르렀다. 자신을 추적해온 두 남자가 자신에게 너로 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경선에게 너로 살라는 말만큼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명령은 없을 것이다. 경선은 결국 건물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을 과연 그녀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선영으로 살기 위해 저지른 타살은 경선에게 자신을 포기하는 자살행위와 같았다. 그녀가 저지른 타살과 자살의 경계가 모호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선택한 그녀의 자살 또한 타살과의 명확한 경계를 가르기 어렵다. 그녀의 자살은 개인으로 하여금 죽음 이외의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에 의한 타살이기도 하다. 돈이라는 기준이 맹목적으로 추종되는 사회에서 삶은 개인들 저마다의 정체성과 고유한 욕망에 기초하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 사회에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은 효율성과 계산가능성이라는 사회의 보편적 요구에 자동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자살과 타살의 경계가 모호한 죽음은 사람을 인격이 없는 죽은 사물처럼 취급하는 사회에서 만연한다. 최근 8년 동안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할 만큼 급증한 자살과 불특정인에게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자행되는 ‘묻지마 살인’에서 우리는 실제로 이런 모호한 죽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지 돈이 강요하는 강압적 현실을 인식할 때, <화차>가 만들어낸 픽션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과 겹쳐진다.  
 
류도향, 강애경, 정유미, <죽음의 세 가지 풍경>,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81-185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8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