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DB에서 검색하고자 하는 내용을 입력하고 를 클릭하십시요.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내용보기

광주 오월을 형상화한 많은 작품들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도 크지만 유사한 사건을 재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문학 쪽에서는 1978년 현기영이 <<순이 삼촌>>을 발표하여 제주도의 4·3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지만, 미술 쪽에서는 오월 미술이 80년 오월을 고발한 이후 비로소 작품화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1989년 강요배가 4·3사건을 작품화한 이후 1994년부터는 4·3사건을 리얼리즘적인 창작 방법으로 표현하는 미술제가 ‘4·3미술제’라는 이름으로 개최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4·3뿐 아니라 제주도의 역사를 알리는 작품들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그날 새벽 총소리가 요란하자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신했어. 그러나 난 아이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남아 있었지. ‘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겠느냐.’ 생각을 했어. 그런데 집집마다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 무조건 살려 달라고 빌었지.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어.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픽 쓰러지니까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하며 내게 달려들었어. 그러나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 ‘어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 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해.”(양복천, 1915년생, 조천면 교래리, <<동백꽃 지다-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천명(天鳴)>, 1991년 젖먹이를 안은 채 총을 맞고 쓰러진 박재옥 여인의 증언이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시작된 제주 4·3사건은 토벌대에 강간을 당한 여자, 죽창을 깎고 입산을 하는 청년들, 포로가 된 주민들, 유격대원의 죽음과 입산한 자식들을 대신하여 죽은 부모들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초토화 작전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몇 년에 걸친 무자비한 학살은 당시 제주도 인구의 9분의 1인 3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1954년 7년 7개월 만에야 종결되었다. 4·3사건은 이민족이 침략해 전쟁을 한 것도 아니고 서로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수 만 명이나 학살한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바다 건너 고립된 제주도였기에 제주도민들만의 아픈 기억으로 남은 채 시간에 묻혀 잊혀 져 갔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에게 4·3은 1954년에 종결된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김경주, <메마른 눈물>, 2000년 아픈 상처를 보듬고 말하지 못했던 이들은 글로 그림으로 조금씩 풀어내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난 1978년 소설로 세상에 알려졌고, 그로부터도 또 10여 년이 지난 후 그림으로 그려지면서 더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제주의 역사와 함께 4·3의 주요 사건을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강요배의 연작들은 일제강점과 해방, 미군정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치르는 혼란기에 겪은 제주도민들의 눈물로 쓴 역사이다.  
 
이선옥, <눈물로 그린 그림>,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48-150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4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