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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죽음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가?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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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용산 참사 이후와 그해 5월 노무현의 죽음 이후 한국 사회가 보여준 사뭇 다른 풍경을 비교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하지만 그의 죽음이 빚어낸 애도 정국 속에서, 특히 진보 진영 속에서 두 죽음에 대한 애도의 방식을 비교하려는 시도는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물론 양자의 죽음 모두 공권력의 무리한 행사(경찰 특공대의 투입과 전직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공격)에 의한 희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 신분(철거민과 전직 대통령)도, 그 방식(타살 혹은 사고사와 자살)도 상이한 두 죽음을 비교하려는 시도에는 어떤 ‘의지’가 작동하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 용산 철거민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토록 냉정했던 사람들이 노무현의 초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한국 사회의 이율배반성에 대한 ‘불편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정치적’인 죽음이라면 김대중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었다. 그리고 용산은 ‘정치 자체의’ 죽음이다.” “마땅히 애도되어야 할 대상이 애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바로 옆의 어떤 것이 누가 봐도 너무 과하게 애도되고 있다면, 그 과열된 애도 행위의 배후에는 정작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감춰져 있는 것일지 모른다.” “노무현 씨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 앞에서 목 놓아 통곡하라.”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자의 죽음>>) 지금 보면 다소 성급하게까지 보이는 이러한 비교론을 여기서 비판하거나 논할 생각은 없다. 분명히 이러한 문장들은 2009년의 정국이 만들어낸 담론들이며 당시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주류 정치인으로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체현하는 것처럼 보였던 한 인물이 실제 현실정치에서 보여주었던 여러 행태들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 그리고 그 여파로써 보수의 승리라기보다는 진보의 완벽한 자멸처럼 보였던 2008년 대선의 뒤끝에서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진보 진영 지식인들의 시선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은 촛불정국과 용산참사, 그리고 노무현의 자살에 이르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이 사회의 대중들이 보여주는 소시민성(조금 더 지나치게 표현한다면 속물성)에 분개했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양 대상에 대한 애도의 온도 차를 우울증적 주체의 애도 방식이라는 세련된 정신분석학적 논의로 정리하기도 했다. 대중들은 용산을 외면하고 대상의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상의 현존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나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접하면서, 대중들은 정체모를 상실감을 이들에게 전이시켜 알 수 없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애도를 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상실한 대상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울증적 주체는 자신의 리비도가 투여되었던 대상의 어떤 것이 자신을 그리 사로잡았던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애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집단적인 애도의 열기는 처음부터 그 대상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우울증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다(정용택, <‘종교’가 되어버린 광장의 애도>).  
 
이영진, <아, 대한민국!>,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87-289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87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