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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자화상들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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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마음은 분노의 소금이 되곤 했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1960년 4‧19혁명은 마산의 고등학생들이 시작하여 대학생과 지식인층으로 확대되었다. 사건의 확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부끄러움이 갖는 의미는 자못 크다. 최루탄이 박힌 한 고등학생의 시신과 이를 비판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 앞에 선배로서 대학생들은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고등학생들이 이러고 있는데, 너희 대학생들은 학교 가서 공부하고 와야? 내려서 데모해라 그 말이야. 너 따위들이 대학생들이냐?”는 당시 광주고 학생 이홍길의 회고가 그 증좌다. 고등학생들도 저러고 있는데 공부만 한다는 것은 대학들에게 있어서 염치없는 곧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형님들 비겁합니다!”라고 절규하던 고등학생들의 용감하고 비장하던 모습, 누구보다도 먼저 총탄에 쓰러져가던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시금석을 놓을 수 있었다. 리영희가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될 정도로 지식인운동에 영향을 끼친 이유는 부끄러움을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식인이라면 “부끄럽고도 추한 얼굴의 자화상을 미워할 줄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분노의 펜을 든 이유의 하나는 당시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의 언론과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신문 사주와 신문인이 권력에 몸을 파는, 곧 강간을 당했기보다 화간에 가까웠다. 어떤 변명을 해도 결국은 한국형 인텔리로서 다시 권력의 심부름을 할 수밖에 없는 언론인으로서, 독자 대중에 불성실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처지가 슬펐고 부끄러웠다”고 그 심정을 고백한다(리영희, <<대화>>). 그래서 그는 분노했고 개인으로서 가능한 노력을 다했다. 언론의 부끄러운 작태는 후배 학생들에 의해 고발되었다. 1971년 3월 24일 서울대 법대생들은 일간 신문과 잡지 등을 불태우는 언론화형식을 가졌다. 25일 문리대생들은 “이제 권력의 주구, 금력의 시녀가 되어버린 너 언론을 슬퍼하며 조국에 반역하고 민족의 부름에 거역한 너 언론을 민족에 대한 반역자,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여 민중의 이름으로 화형에 처하려 한다”라고 선언했다. 이어 학생들은 “선배 투사의 한 서린 해골 뒤에 눌러앉아 대중을 우민화하고 오도하여 얻은 그 허울 좋은 대가로 안일과 축제를 일삼는 자들”(강준만,  
 
김창규, <지식인의 분노와 부끄러움>,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49-253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49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