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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오의 연쇄에서 벗어나기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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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화의 가면에 몸을 숨긴 채, 상대방에 대한 증오만을 부추기는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해 한 사회가 정당한 애도를 표하는 공감의 정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물론 그러한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다. 조국의 배신자로 죽은, 그래서 장례 자체가 국법으로 금지된 오빠에 대한 안티고네의 애도가 몰고 온 파장과 그녀의 유배와 뒤이은 자살이 몰고 온 죽음의 연쇄(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다 결국 자살한 약혼자 하이몬과 아들의 죽음으로 비통에 빠져 자살한 하이몬의 어머니이자 왕비 에우리뒤케)에서 보듯. 고대에서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한 사회에서 부과된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그 어려움은 비단 정치인, 즉 명사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2009년 1월 망루에서 숨진 다섯 명의 철거민과 한 명의 경찰특공대원을 함께 애도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을 함께 애도한다는 것은 결코 이들 모두 권력의 희생자들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작 당사자인 철거민들의 유족과 경찰특공대원의 유족이 이러한 결론에 동의할 수 있을까. <두개의 문>이 그 참신한 기획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아마 그러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강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성급하고 안이한 봉합, 거짓 화해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가 말하듯, 어머니에게 있어 역사적 사실이란 아이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죽은 아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죽음을 둘러싸고 강렬한 감정의 교차가 발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결코 추상명사가 아니다. 더구나 그 죽음의 원인을 외부의 적으로 돌릴 수 없는 경우 그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증오에 찬 힐난에서 벗어나, 왜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즉 그 죽음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공감을 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은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손아람의 소설 <<소수의견>>의 결말부에는 경찰특공대원이었던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하지만 그 역시 경찰과 대치중이던 현장에서 아들을 잃고 지금은 피고석에 선 한 철거민 아버지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 있다. 법정의 증인석에서 죽은 특공대원의 아버지는 철거민 아버지를 위해 진술한다. “아들이 죽고 나서 저는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누가 아들을 죽였는가, 그게 아니라 왜 아들이 죽었는가를요. 저는 누가 아들을 죽였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걸 궁금해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박재호 씨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박재호 씨는 누가 아들을 죽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같은 아버지 된 자로서 그 슬픔과 분노에 공감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박재호 씨가 제 아들을 죽이게 된 건 피치 못할 상황에서의 실수였을 거라고요. 저는 박재호 씨가 처벌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진술을 마친 그에게, 만약 피고가 정당방위라면 경찰인 당신의 아들이 혹시 현장에서 피고인의 아들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냐는 검사의 가학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그는 울먹이며 말한다. “네. 그렇습니다. 제 아들이 그 아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만족합니까.” 아들을 기리는 그 울음은 세상에 유일무이한 슬픈 울림을 가졌다. 그 유일한 울림을 이해하는 또 한 명의 아버지가 공명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증오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나는 그것을 픽션에 불과하다고, 혹은 값싼 감상이나 섣부른 화해라고 폄하하고 싶지 않다. 두 아버지가 만나 자식을 잃은 슬픔에 공감하고 애도를 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식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한 지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의 망루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우리가 목도해야 했던 풍경이다. 영원회귀인 것일까? 악마의 속삭임을 단호히 뿌리칠 수도, 그렇다고 초인의 출현을 기다릴 마음도 없다. 다만, 죽음의 정치necro politics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 ‘난사(難死: 고통 받으며 어렵게 죽어감)에 대한 공감, 그리고 그로부터 연유하는 분노와 애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니,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폭력에 대처하는 코이너씨의 자세(브레히트)가 여전히, 아니 더욱 더 절실한 시대이다.  
 
이영진, <아, 대한민국!>,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94-297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94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