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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도저한 사회진화론”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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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망루에 올라간 세입자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반드시 동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사회의 일반적 시각에서 그들은 남의 재산권 행사를 방해하며 떼를 쓰는 골칫덩어리로 간주된다. “안타깝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근데 말이야. 집주인들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냐. 집주인도 재개발을 해야 할 것 아냐. 근데 왜 자기 먹고 살자고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서 점거하고 재산에 불을 지르냐고. 그게 자기네들 꺼는 아니잖아. 먹고 살자고 한 것인 건 알지만 그래도 남의 재산에 그래서는 안 되지. 가난하고 다 절박하다고 남의 재산을 함부로 다루면 남아나는 게 뭐가 있겠어? 그럼 나라 꼬라지가 제대로 돌아가겠어?”(엄기호, <‘정치’적 죽음, ‘역사’적 죽음, 정치의 죽음>) 지극히 위악적이지만, 이 대사는 용산 참사 뉴스를 보며 몇몇 아저씨들이 목욕탕에서 나눈 극히 사소한 대화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은 비단 한국사회에서 극히 소수인 가진 자들만의 것일까. 한국사회에서 재산권은 인권보다도 훨씬 소중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재개발 지역 용산은 뉴타운, 바로 한국 중산층의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내쫓긴 철거민들의 현실에 대한 연민보다도 재산권의 보장이라는 현안이 용산 참사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더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이 평범한 아저씨들의 대사는 또 누군가가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어느 강남 1세대의 회고담을 떠오르게 한다. 자, 여기에 두 가지 종류의 해결안이 있다. 한편에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만 비현실적인 해결안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온갖 윤리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은 해결안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민스키Minsky가 별다른 망설임 없이 후자의 해결안을 택한다는 점이다. 그의 해결안은 명쾌하다. 즉 우리는 미래의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더 나아가 우리의 유전적 후손을 좀 더 지적인 존재로 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느니 존엄성을 가진 존재라느니 하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기 바란다. 그것들은 팩트fact가 아니라 가치일 뿐이다. 우리가 언제 그런 가치를 사회적 공리로 추구해야 한다고 합의한 적이 있었는가?(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현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 안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흐르는 이 도저한 사회진화론에 ‘아니오’라고 거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현세의 삶은 약육강식의 전장일 뿐이라는 논리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과연 ‘인권’, ‘가치’, ‘박애’와 같은 사상이 들어설 여지가 있을까. 그래서 어느 소설가도 변호사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항변할 뿐이다. “세상에 주어진 하루마다 많은, 생물들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상들이, 많은 문화들이 도태된다. 그것은 멸종이고 멸종은 적자생존의 법이다. 연민은 자연의 법을 거스르는 허위의식인가. 나는 진화론자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연민은 왜 진화했을까. 그렇다면 연민은 왜 도태되지 않았는가(손아람, <<소수의견>>).” 물론 ‘연민’이라는 태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연민은, 위로부터 아래로 미치는 시선, 18세기라면 불행한 사람들les malheureux, 19세기에는 비참한 사람들les misérables로 명명된 사람들을 향하는 시선이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박애주의, 즉 사람들이 ‘비인간적으로’ 취급받고 있는 세계에 대한 증오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는 바로 그 시선의 정치사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에 대해 아렌트는 왜 우리는 연민 없이 친절하게 될 수는 없는가, 즉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볼 때 느끼는 자신의 고통으로 자극받고 실제로 강제되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비겁한 존재들인가라는 키케로의 물음을 인용하며, 박애주의의 정치사상적 한계를 비판한다. 아렌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박애가 아니라 우정, 필리아philia였다(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하지만 아렌트의 이런 입장은 현대 한국사회의 야만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이상적으로 보인다. 아직 우리의 현실에서는 박애, 연민마저도 ‘과분한’ 정치사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니, 우리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변론하기 위해 진화론을 끌어들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알기 쉽게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다. 초기 자본주의가 빚어낸 약육강식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당신들, 가진 자들이었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고귀한 인간성도, 가치를 위해서도, 그 무엇도 아닌, 단지 “(자신들의)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라고.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그 약육강식과 혼돈의 역사를 다시 몸소 학습하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경제권력과 종교권력, 정치권력이 서로 결탁한 새로운 로마제국(주원규, <<망루>>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망루에서 내려다본 2013년 대한민국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이영진, <아, 대한민국!>,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84-287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84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