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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저항의 지형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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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 롤랑은 “증오란 정당한 것이다. 부정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일갈한다. 불의에 직면하여 그것을 증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문구는 서울의 한 경찰서 현관에 게시되어 주목을 받았다. 증오는 분노보다 더 극단적인 감정 상태를 보이지만, 불의에 분노한다는 것은 분노의 지형을 지시해준다. 분노는 단지 감정적 차원의 호오에 따른 심리적 반응만이 아니다. 분노는 저항적 행위와 결부되어 현재의 상태를 넘어서 보다 나은 세계를 지향한다. 그러한 점에서 분노와 저항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자 이상을 향한 분투이다. 동양과 서양의 공간적 차이와 고대와 현대라는 시간적 다름을 막론하고, 인간은 생존을 위한 분투의 과정 속에서 이전에 없었던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온 존재이다. 역사라는 누적된 삶의 기록은 ‘현재와 다른’ 혹은 ‘현재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인간 실존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면서 보다 나은 상태로 옮겨 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어쩌면 생물학적 본능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스피노자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생물학적인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코나투스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분투적 존재’라고 하는 스피노자의 규정은 사람이 곧 분투하는 존재이자 저항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인지생물학자인 다마지오는 코나투스에 대하여 “위험과 가능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존해 나가고자 하는 원동력과 수많은 신체의 부분들을 하나로 유지시켜 주는 수많은 자기 보존 활동”으로 파악한다. 생명체는 성장함에 따라 각 부분을 구성하는 물질이 새로워지고,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생명체의 몸은 변형을 겪게 된다. 이 생명체를 계속해서 동일한 개체로 유지시켜 주고 동일한 구조적 설계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코나투스, 즉 생명의 분투요, 노력이며 경향이다. 분투란 인간이 ‘변화/운동’의 차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투는 그러한 ‘변화/운동’의 차원에서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존재라는 존재론적 자기 위상을 정립하게 만든다. 그와 같은 ‘변화/운동’의 장(혹은 계열, 필드)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저항은 생명의 원천적 동력으로 작동한다. 물론 과도한 생존 투쟁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지나 멈춤 혹은 고요함의 또 다른 계열을 추구하는 인간의 조건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인간이 현재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변화하려는 성향은 현재와는 다른, 아니면 아직 성취하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반영한다. 현실이 폭압적일수록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구는 ‘증폭’되거나 ‘거세’된다.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던져주는 불가해성에 대해 인간의 근본적인 성찰은 현실의 지반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 대한 갈망은 어쩌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다가설 수 없는 것을 인간은 ‘이상’ 이나 ‘이상향’ 혹은 ‘유토피아’나 ‘피안’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포착하여 현실에 두고자 한다. 고통과 등가인 희망의 처절함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김경호, <분노한다 고로 살아간다>,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71-273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7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