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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면은 존재와 가치의 최후 보루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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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염치와 직결된다. 올바르고 깨끗한 정신 상태에서 스스로 정한 자신의 기준에 따라 부끄러움을 인식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마음이 염치다. 염은 곧고 마음이 맑은 상태이고, 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곧 염치는 옳지 않음에 대한 부끄러운 자각이다. 염치가 있다는 것은 체면이 선 떳떳한 상태로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으며 그럴 경우 선비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학적 전통에서 체면은 인격의 성숙과 연결되며, 따라서 체면을 지킨다 함은 사람의 도리를 다함을 뜻한다. 임진왜란시기의 호남의병을 체면과 관련시켜 보자. 임란 이전 호남은 기축옥사 때문에 ‘반역의 땅’이라 하여 인재의 등용에 제한이 가해졌다. 그런데 임란이라는 국가적 환란에 직면하자 마치 벌떼와도 같이 여기저기서 의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났다. 왜 그랬을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란으로 강토가 초토화되자 선조는 “지난 기축년의 역변 이후에 도내의 걸출한 인물들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골짜기에 외롭게 홀로 향기를 품고 있으며, 아름다운 옥이 형산에 광채를 감추게 되었도다. 이제야 난을 당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구나”라고, 과거 기축옥사로 호남인물의 정치적 진로가 차단되었음을 인정하면서 곤혹스러운 도움 요청을 한다. 갖가지 미사여구를 동원한 선조의 발언은 아직 유린을 당하지 않은 호남지역 선비들의 체면을 적당히 세워줌으로써, 그들을 국난 극복에 참여시키려는 정치적 발언으로 이해된다. 왕의 교서를 보면 호남 사림의 체면도 이제는 적당히 세워졌다 할 수 있다. 체면은 선비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생명과도 같아 그들의 은거와 출사의 문제는 체면과 관계된다. 선조의 교서는 ‘반역의 땅’이라는 부끄러운 수식어는 떼고 중앙 정계에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체면이 섰으니 다음 순서는 곧 기의였다. 당연히 호남지방의 의병은 근왕적 성격이 짙었다. 이렇듯 지식인들에게 체면은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담보해주는 최후의 보루로, 체면이 상하였을 때 지식인들은 헌걸찬 기질로 목숨을 걸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다. 때로는 최고 권력자를 향하여 자신을 기개를 들어냈는데 이는 체면 때문이기도 했다. 각종의 상소문, 선언문, 성명서는 그 의지의 표현이었고, 각종 운동에 참여는 몸짓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의 진보를 가져온 역동적인 힘이 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전통이 근현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후 호남인들은 차별과 소외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호남인들이 그 질곡에서 벗어나는 길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데에 있었다. 이 때 호남인들에게 나타난 김대중은 어떤 존재였는가? 개인적인 매력의 측면에서도 김대중은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늠름한 풍모와 호탕한 언술,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위대한 이상, 백절불굴의 강한 의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학문적 식견을 가진 김대중은, 호남인의 한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비범한 정치가로서 그는 호남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메시아적 존재와 같았다. 1980년 김대중의 연행은 한 개인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아니라 호남인의 꿈을 일거에 짓밟아 버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그가 빨갱이로 내몰린다는 것은 호남인들이 곧 빨갱이를 지지하였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호남이 어떤 땅인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자부심 하나로 온갖 차별과 냉대에도 굴하지 않은 고장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빨갱이란 말인가? 이는 호남인의 자존심과 체면을 짓뭉게버린 행위가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지역주의 차별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과 김대중 체포로 인한 불만은 광주항쟁 발생의 부차적인 이유일 수 있다. 빨갱이나 폭도로 호남인을 내몬 것은 호남인의 자존심과 체면을 짓밟아버린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정치적 해석을 떠나 인간이기에 느껴야만 했던 그런 감정이 결국은 항쟁을 촉발시키지 않았을까?  
 
김창규, <지식인의 분노와 부끄러움>,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46-248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46페이지    E-BOOK 바로가기